회사를 잠시 쉬기로 하고 1년을 정해둔 지 벌써 열한 달이 지났습니다.
계획대로라면 8월에 이 시간을 마무리하게 되는데, 한 달 정도 남은 지금 한 번 정리해두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결산이라고 하기엔 거창하고, 서랍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서 "이건 남았다, 이건 안 남았다" 하고 나눠보는 정도예요.
솔직하게 쓰려고 하니 자랑할 만한 결과보다 인정해야 할 것들이 더 많아서, 오히려 쓰기 전에 마음이 정리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세운 계획은 세 가지였습니다.
아이템 탐색, 배운 것 정리, 작게 직접 만들어보기.
돌아보면 이 중에서 가장 꾸준히 한 건 정리였어요.
책을 읽고 나면 요약을 남기고, 시장 조사를 하면 가정과 계산 과정을 같이 적고, 인터뷰를 해보면 질문을 어떻게 잘못했는지까지 기록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걸 누가 읽겠나" 싶었는데, 몇 달 지나서 예전 노트를 열어보니 그때의 내 생각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훨씬 쓸모가 있더라고요.
아이템 탐색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불편함을 모으는 노트를 쓰고, 후보를 몇 개 뽑아서 시장 규모를 어림해보고, 경쟁 서비스를 비교하고, 가격을 어떻게 잡을지 가정을 세워보는 일을 여러 번 반복했어요.
작게 만들어보는 건 노코드 도구로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보고, 사업계획서와 발표 자료의 구조를 직접 짜보는 수준이었습니다.
"창업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은 아직 하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에요.
준비하고, 정리하고, 공부하고, 작게 해본 1년이었습니다.
가장 확실하게 남은 건 기록입니다.
노트와 글이 쌓이면서 "내가 어떤 질문을 자주 던지는 사람인지"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어 어떤 아이디어를 보든 저는 "이 서비스를 쓰는 사람의 하루 중 어느 순간이 바뀌지?"를 먼저 묻더라고요.
반대로 "이걸 만들면 얼마나 벌 수 있지?"는 한참 뒤에야 떠올리는 편이었습니다.
이런 습관은 일할 때는 잘 안 보였는데,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열 번쯤 적어보니 선명해졌습니다.
기록이 남긴 또 하나의 선물은 실패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점입니다.
고객 인터뷰에서 유도 질문을 해서 듣고 싶은 답만 들었던 일, 시장 규모를 계산하면서 가정을 슬쩍 낙관적으로 잡았던 일 같은 것들이 노트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읽으면 "여기서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봤구나" 하고 바로 알아챕니다.
기록하지 않았다면 기억 속에서 그럴듯하게 미화되었을 거예요.
두 번째로 남은 건 관점입니다.
기획자로 일할 때는 "무엇을 만들까"를 주로 고민했다면, 이번 1년 동안은 "왜, 누구에게, 얼마에, 어떻게 알릴까"까지 한 줄로 이어서 보는 연습을 했어요.
기능 하나를 정하더라도 그게 가격과 운영 부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같이 떠올리게 됐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이렇게 이어서 보는 습관은 계속 가져갈 것 같습니다.
반대로 남지 않은 것도 분명합니다.
"이거다" 싶은 아이템에 대한 확신은 결국 생기지 않았어요.
후보는 여러 개 있었고 각각 그럴듯한 이유도 있었지만, 인터뷰나 계산을 거치고 나면 어김없이 한두 가지 약한 고리가 보였습니다.
그 약한 고리를 메울 만큼 이 문제에 오래 매달릴 자신이 있는가를 스스로 물었을 때, 선뜻 "그렇다"고 답하지 못했어요.
예를 들어 어떤 후보는 시장은 충분해 보이는데 제가 그 분야의 일상을 직접 겪어본 적이 없었고, 다른 후보는 제가 잘 아는 영역인데 시장이 너무 작아 보였습니다.
둘 다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확신이라는 말을 붙이기엔 부족했습니다.
이걸 실패라고 부를지 한참 고민했어요.
지금은 "확신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는 것도 1년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확신 없이 시작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소모를 미리 겪어본 셈이니까요.
그러면 다음은 무엇이냐는 질문이 남습니다.
정리하다 보니 제가 꾸준히 흥미를 느낀 주제가 두 갈래로 모였어요.
하나는 동네 업장이나 소규모 사업자의 운영, 그중에서도 예약과 일정 같은 일상적인 도메인입니다.
시간과 자원과 사람이 맞물려 돌아가는 구조가 복잡해 보이지만 풀어보면 규칙이 분명해서, 기획자가 파고들 여지가 많다고 느꼈습니다.
다른 하나는 AI 공부입니다.
올해 들어 초거대 모델 소식이 계속 들려오는데, 이게 제가 다룰 도메인에 어떻게 닿을지 알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8월이 지나면 예약과 운영 도메인의 기획으로 돌아가는 쪽을 알아보고, AI 공부는 일과 병행하며 계속 가져가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형태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확정되기 전에 미리 단정해서 쓰고 싶지는 않아요.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쉬는 동안 몸에 붙은 느린 속도입니다.
혼자 생각하고 정리하는 시간이 길었던 만큼, 다시 여러 사람과 일정에 맞춰 움직이는 리듬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그래서 8월 한 달은 일부러 하루 일정을 조금 더 촘촘하게 짜보는 연습을 해보려고 합니다.
작은 것 같지만, 쉬는 시간의 끝에서 가장 현실적인 준비라고 느껴요.
1년 전에는 "정리가 필요하다"는 막연한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정리한 결과물보다 정리하는 습관 자체가 더 큰 소득이라고 느껴요.
기록은 남았고, 관점은 바뀌었고, 확신은 남지 않았습니다.
이 셋을 솔직하게 적어두는 것만으로도 다음 걸음을 훨씬 가볍게 내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은 한 달은 새로운 걸 시작하기보다 지금까지의 노트를 한 번 훑어서 버릴 것과 남길 것을 나누는 데 쓰려고 합니다.
이 블로그에 올린 글들도 그 과정에서 다시 읽어보고 고쳐 쓸 곳이 있으면 고칠 생각이에요.
다음 글부터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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