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늘 하는 게 있습니다.
그 해 AI 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 혼자 노트에 정리해보는 거예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3년째 하고 있는데, 올해는 유독 상반기와 하반기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던 해라서 따로 정리해두고 싶었습니다.
상반기 - 재택과 자동화가 갑자기 앞당겨졌다
1월까지만 해도 팀 내부 로드맵에 "AI 자동화"는 3분기쯤 검토하자는 정도로 느슨하게 잡혀 있었어요.
그런데 2월 말부터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재택근무가 시작되면서 대면으로 처리하던 승인, 확인, 배송 안내 같은 업무가 갑자기 마비됐고, 저희 팀도 급하게 CS 자동화 검토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처음 챗봇 엔진 몇 개를 비교 검토했는데, 이전까지는 "언젠가 해볼까" 정도였던 게 "이번 달 안에 뭐라도 띄워야 한다"로 바뀌더라고요.
상반기 내내 느낀 건, 이때 나온 AI 관련 논의는 대부분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이미 있던 기술을 얼마나 빨리 적용하느냐"의 문제였다는 겁니다.
NLU 기반 챗봇, RPA, 화상회의 자동 요약처럼 이전부터 존재했던 기술들이 갑자기 필수품이 됐어요.
저희 팀도 상반기에 만든 챗봇은 사실 기술적으로 새로운 게 거의 없었는데, "지금 당장 문의량을 줄여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에 3주 만에 런칭까지 밀어붙였던 기억이 나요.
지금 보면 완성도는 아쉬웠지만, 그 절박함이 없었으면 그 정도 속도로는 절대 못 나왔을 프로젝트였습니다.
하반기 - 초거대 언어모델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여름을 지나면서 분위기가 또 한 번 바뀌었습니다.
해외에서 나온 대규모 언어모델 소식이 국내 개발자 커뮤니티에도 빠르게 퍼졌고, "이 정도 규모의 모델이면 뭘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저희 팀 회의에도 슬쩍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아직 상용 서비스에 바로 붙이기엔 이른 단계였지만, 저는 이때부터 "몇 년 안에 텍스트 생성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바뀔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반기에는 상반기와 달리 "급해서 하는" 프로젝트보다 "미리 준비해두는" 성격의 검토가 많았어요.
저희 팀은 사내 문서 검색에 이런 대규모 모델을 붙여보면 어떨지 작은 스터디를 시작했고, 아직 실제 적용까지는 못 갔지만 다음 해 로드맵의 씨앗이 됐습니다.
동시에 데이터 편향 문제나 저작권 이슈에 대한 논의도 하반기부터 부쩍 늘었는데, 기술이 할 수 있는 일과 서비스에 안전하게 쓸 수 있는 일 사이의 간극을 팀 전체가 체감하기 시작한 시기였다고 봐요.
노트에 남겨둔 숫자들
매년 이 정리를 할 때 저는 느낌만 적지 않고 숫자도 몇 개 같이 남겨둡니다.
올해 노트에는 상반기 CS 문의량이 평소보다 최대 2.8배까지 튀었던 주가 있었다는 것,
급하게 만든 챗봇이 첫 달에 처리한 문의가 전체의 35% 정도였다는 것,
그리고 하반기에 검토한 대규모 언어모델 관련 문서를 팀 내부 위키에 12건 정리했다는 것을 적어뒀어요.
숫자로 남겨두면 나중에 "그때 진짜 힘들었지"라는 느낌만 남는 게 아니라, 내년에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작년엔 이 정도 규모였다"는 비교 기준이 생겨서 도움이 됩니다.
실제로 이 노트 덕분에, 다음 해 비슷한 문의량 급증이 왔을 때는 훨씬 빠르게 대응 규모를 잡을 수 있었어요.
상반기는 생존을 위한 속도였고, 하반기는 다음을 준비하기 위한 속도였습니다.
성격은 달랐지만 둘 다 "AI를 도입할지 말지 고민할 시간이 예전보다 훨씬 줄었다"는 공통점이 있었어요.
예전엔 신기술 검토에 몇 개월씩 쓸 수 있었는데, 올해는 몇 주 안에 결론을 내야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습니다.
기획자로서 이 흐름에서 배운 건, 기술 자체를 다 알 필요는 없지만 "이게 우리 문제에 지금 쓸 수 있는 수준인가"를 빠르게 판단하는 감각은 반드시 키워야 한다는 거였어요.
내년엔 이 감각이 훨씬 더 중요해질 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연말 노트 정리하면서 든 생각인데, 내년 이맘때는 또 얼마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조금 긴장도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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