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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PM

AI 시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기획의 영역

2026. 9. 23.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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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AI가 PM을 대체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정말 자주 받습니다.
콘퍼런스에서도, 사내 회의에서도, 심지어 이 블로그 방문자분들 댓글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계속 나와요.
저는 이 질문에 매번 조금씩 다르게 답해왔는데, 이번 기회에 제 생각을 한 번 제대로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저는 "대체된다"보다는 "역할이 재배치된다"는 쪽에 가깝게 생각하고 있어요.
다만 그 재배치가 어디서, 왜 일어나는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해보고 싶었습니다.

 

먼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게 있어요.
요구사항 문서를 정리하고, 여러 대안을 나열하고, 회의록을 요약하고, 유사 사례를 조사하는 일 - 이런 건 이제 AI가 사람보다 빠르고, 어떤 경우엔 더 꼼꼼하게 해냅니다.
저도 최근 몇 달간 요구사항정의서 초안을 AI한테 먼저 뽑아달라고 하고, 그걸 다듬는 방식으로 일하고 있는데, 이 방식으로 문서 작업 시간이 확실히 줄었어요.
경쟁사 분석 자료를 만들 때도, 예전엔 하루 종일 걸리던 정보 수집이 이제는 한두 시간이면 초안이 나옵니다.
이 변화를 부정하거나 애써 무시하는 건 기획자 입장에서 오히려 손해라고 생각해요.
AI가 잘하는 걸 AI에게 맡기고, 그 시간을 다른 데 쓰는 게 훨씬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겁니다.

AI는 주어진 정보 안에서 최선의 답을 냅니다.
그런데 기획자가 실제로 하는 일의 상당 부분은 "주어지지 않은 정보를 알아내는 것", 그리고 "여러 이해관계자의 말 사이에 있는 진짜 의도를 읽어내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경영진이 "이 기능 왜 아직 안 됐냐"고 물을 때, 표면적인 질문은 "일정"에 관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이 프로젝트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걸 읽어내려면 그 사람의 평소 말투, 최근 있었던 다른 이슈, 회사 내부 정치적 상황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데, 이건 문서화되지 않은 맥락이라 AI에게 넘길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에요.


제가 실제로 겪었던 사례를 하나 들면, 작년에 한 프로젝트가 계속 지연되고 있었는데 경영진 회의에서 "일정을 앞당길 수 없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일정 문제였지만, 제가 따로 파악해보니 실제로는 그 프로젝트와 경쟁하는 다른 팀의 프로젝트가 먼저 나올까 봐 생긴 불안이었어요.
그걸 파악하고 나서야 "일정을 앞당기자"가 아니라 "먼저 중간 결과라도 공유해서 불안을 줄이자"는 방향으로 제안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이런 판단은 AI에게 "이 상황에서 뭘 해야 하나요"라고 물어봐서 나오는 답이 아니었어요.

AI는 맥락 속에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AI에 대해 또 생각해볼 지점은 "책임"에 대한 부분입니다. 
AI가 제안한 방향이 틀렸을 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결국 사람이 집니다.
이건 단순히 "누가 혼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저는 최근에 신입 기획자에게 화면설계 지시를 하고, 화면설계에 이상한 기능이 있어서 "왜 이렇게 했냐"는 질문을 했는데, "클로드가 그렇게 작성해서요" 라는 답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AI가 준 근거를 그대로 옮겼을 뿐, 신입 기획자는 그 판단을 본인의 것으로 소화하지 못했던 거예요.
그 이후로는 AI가 어떤 제안을 하든, 그 이유를 본인의 언어로 다시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검토하라고 이야기 했던적이 있습니다. 
설명하지 못하면 그건 제 결정이 아니라 그냥 AI의 결정을 대신 전달한 것뿐이니까요.
책임질 수 있는 판단만이 진짜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기획의 좀 더 근본적인 이야기인데, 사용자 인터뷰나 고객 피드백을 다룰 때 느끼는 부분입니다.
사용자가 "이 기능 불편해요"라고 말할 때, 그 말 뒤에 있는 감정과 상황을 읽어내는 건 여전히 사람이 훨씬 잘합니다.
저희가 진행했던 한 인터뷰에서, 사용자는 "검색이 느려서 불편하다"고 했는데, 실제로 대화를 더 나눠보니 진짜 문제는 "검색 결과가 자기가 원하는 걸 안 보여준다"는 신뢰의 문제였어요.
속도 문제로 접수했으면 서버를 증설하는 방향으로 갔을 텐데, 실제로는 검색 알고리즘의 정확도 문제였던 거죠.
AI가 인터뷰 스크립트를 요약하고 키워드를 뽑아주는 건 도움이 되지만, 그 사람의 목소리 톤, 망설이던 지점, 갑자기 말을 바꾼 순간 같은 미묘한 신호를 캐치하는 건 아직도 사람의 역할이라고 느낍니다.

 

그리고 이건 조직 내부 정치에 관한 이야기인데...
아무리 좋은 기능이라도 개발 리소스는 한정되어 있고, 여러 팀이 서로 자기 프로젝트를 우선순위에 올리고 싶어합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협상과 조율은 데이터만으로 풀리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이 지표가 더 중요하다"는 논리적인 설득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이 팀이 최근에 어떤 프로젝트에서 밀렸는지", "이번엔 저 팀에 양보해줘야 다음에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같은 관계의 맥락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건 굉장히 인간적인 영역이고, 저는 이 부분이야말로 AI가 대체하기 가장 어려운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회의실 분위기를 읽고,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말을 꺼내는 감각은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거니까요.

 

그래서 기획자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이 모든 걸 정리하면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AI가 잘하는 정보 정리, 초안 작성, 반복적인 분석 업무는 적극적으로 AI에게 넘기고, 그 시간을 맥락을 읽고 판단하고 관계를 조율하는 데 써야 한다는 거예요.
문서 쓰는 실력보다 사람과 대화하는 실력, 데이터 분석보다 그 데이터 뒤에 숨은 맥락을 읽는 감각, 이런 것들이 앞으로 기획자에게 더 중요해질 거라고 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AI 시대가 될수록 기획자는 더 "사람다운" 역량을 키워야 하는 상황이 된 것 같아요.
논리적인 분석 능력이야 AI가 도와주니까, 오히려 공감 능력, 관계를 읽는 감각, 책임지고 결정하는 태도 같은 것들이 차별점이 되는 거죠.

 

이 글을 쓰면서도 제 결론이 몇 년 후에는 또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AI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맥락을 이해하게 될 수도 있고, 그때는 오늘 제가 "사람만의 영역"이라고 말한 것들 중 일부가 다시 AI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지금 시점에서는,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걸 왜 하는가", "누구를 위해 하는가", "책임은 누가 지는가"를 묻는 사람은 계속 필요할 거라고 믿고 있어요.
그 질문을 계속 던지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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