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기 시작하고 첫 번째로 붙잡은 질문은 "그래서 무엇을 만들까"였습니다.
처음 일주일은 이 질문 때문에 오히려 아무것도 못 했어요.
노트에 아이디어를 쓰기 시작하면 금세 스무 개쯤 나오는데, 읽어 보면 하나같이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고 하나같이 별로인 것 같기도 했거든요.
그러다 책과 사례를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아이디어가 많은 것과 좋은 아이템을 찾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점이에요.
이 글은 그 차이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리고 후보를 어떻게 거르기로 했는지 정리한 기록입니다.
아이템을 찾는 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기술이나 유행에서 출발하는 길입니다.
"요즘 이 기술이 뜬다더라, 이걸로 뭘 할 수 있을까" 하고 거꾸로 쓸모를 찾는 방식이에요.
재미있고 의욕도 잘 생기는데, 해결할 문제가 없는 상태에서 만들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문제에서 출발하는 길입니다.
"누가, 언제, 무엇 때문에 불편한가"를 먼저 보고,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방법을 찾는 방식이에요.
덜 화려하지만 만들고 난 뒤 "이걸 왜 써야 하지"라는 질문에 답하기 쉽습니다.
물론 두 갈래가 완전히 따로 노는 것은 아니고, 기술에서 시작해서 문제를 만나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겁니다.
다만 저는 기획자로 일해 온 사람이라서,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문제 쪽에서 출발해 보기로 했어요.
기술은 도구이고, 도구를 고르는 것은 문제를 정한 다음이라고 순서를 정해 둔 셈입니다.
문제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세상의 모든 문제를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내가 직접 겪었거나 가까이서 본 영역" 안에서만 후보를 뽑아 보기로 했어요.
기준은 단순합니다.
일하면서 오래 접해서 용어와 맥락을 아는 영역인지, 주변에 그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지, 내가 실제 사용자로서 불편을 느껴 본 적이 있는지입니다.
예를 들어 제 경우를 가정해서 적어 보면 이런 식입니다.
서비스 기획 경험이 있으니 "기획 문서를 관리하는 일", 동네에서 소규모로 운영하는 가게를 자주 이용하니 "작은 업장의 예약이나 고객 관리", 책을 많이 읽으니 "읽은 것을 기록하고 다시 찾는 일" 같은 영역이 나옵니다.
이 세 영역에서 각각 후보 서너 개씩만 뽑아 보니 총 열 개 정도가 모였어요.
이때 중요하다고 느낀 점은 "내가 겪은 불편"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 불편한 일인지, 비슷한 상황의 다른 사람도 같은 불편을 겪는지는 따로 확인해야 하더라고요.
그건 다음 단계에서 고객 이야기를 들으며 해 볼 일이고, 이 단계에서는 일단 후보를 뽑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열 개쯤 모인 후보는 질문 몇 개로 걸러 보기로 했습니다.
책에서 본 체크 항목을 제 방식으로 줄여서, 다섯 개로 만들어 두었어요.
첫째, 이 문제는 누가 겪는가요.
"모든 사람"이라고 답하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겁니다.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람 한 명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해요.
둘째, 그 사람은 지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나요.
엑셀, 메모장, 전화, 아니면 그냥 참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재 해결책이 아예 없는 문제는 오히려 문제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들었어요.
셋째, 이 문제는 얼마나 자주, 얼마나 크게 불편한가요.
일 년에 한 번 겪는 큰 불편과 하루에 열 번 겪는 작은 불편은 성격이 아주 다릅니다.
둘 다 가능성은 있지만 어느 쪽인지는 알고 있어야 해요.
넷째, 그 사람이 돈이나 시간을 쓸 만한 문제인가요.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과 해결을 위해 무언가를 내놓는 것 사이에는 꽤 거리가 있다고 합니다.
다섯째, 나는 이 문제를 1년 동안 계속 들여다볼 수 있는가요.
아이템은 결국 오래 붙들고 있어야 하는 대상이라서, 내가 질리지 않고 궁금해할 수 있는 주제인지도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가정 예시로, "동네 작은 업장의 예약 관리" 후보를 이 질문에 대 보면 이렇습니다.
겪는 사람은 혼자 또는 두세 명이 운영하는 업장의 사장님이고, 지금은 전화와 수첩이나 메신저로 처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빈도는 매일 겪는 불편이고, 돈을 쓸 의사가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는 칸이 남습니다.
이렇게 "모르겠다"로 남는 칸이 곧 다음에 확인해야 할 질문이 된다는 점이 꽤 유용했어요.
다섯 질문을 열 개 후보에 적용해 보니, 의외로 많은 후보가 둘째와 넷째 질문에서 막혔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해결하나요"에 답을 못하거나, "돈을 쓸 문제인가요"에 확신이 없는 경우였어요.
아이디어 단계에서는 그럴듯했는데 질문을 거치니 힘이 빠지는 것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반대로 후보 이름은 평범해도 다섯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할 수 있는 것은 훨씬 믿음이 갔어요.
아이템이 근사한지보다 질문에 얼마나 구체적으로 답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신호 같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 습관도 하나 발견했습니다.
저는 아이디어를 평가할 때 "만들기 쉬운가"를 너무 일찍 계산하는 편이었어요.
기획자 버릇이라 그런 것 같은데, 이 단계에서는 만들기 어려운지보다 풀 가치가 있는 문제인지를 먼저 보는 게 맞다고 다시 정리했습니다.
아직 어느 아이템도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섯 개 질문을 통과한 후보가 서너 개 남았고, 이제는 그 후보들로 실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볼 차례입니다.
남은 질문도 있어요.
내 경험과 가까운 영역에서만 찾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그래서 후보를 뽑는 범위 바깥에서도 가끔 눈에 띄는 문제를 따로 적어 두려고 해요.
이건 다음 글에서 이야기할 불편함 기록 습관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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