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서치 없이 기획을 진행했다가 크게 방향을 틀어야 했던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가 조금 부끄럽지만,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는 팀을 요즘도 자주 봐서 정리해보기로 했습니다.
작년에 맡았던 마이페이지 개편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리서치를 건너뛰었습니다.
경영진 회의에서 "요즘 트렌드가 이렇다더라"는 이야기가 나왔고, 저도 다른 서비스들의 마이페이지를 벤치마킹하면서 "우리 사용자도 이런 걸 원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바로 기획에 들어갔어요.
일정도 촉박했고, "굳이 리서치까지 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컸습니다.
결과물이 나오는 대로 사용자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던 거죠.
디자인과 개발까지 6주를 들여 완성한 개편 버전을 배포했습니다.
그런데 배포 2주 뒤 지표를 보니, 마이페이지 체류 시간이 오히려 15% 줄었고, 핵심 기능이었던 "즐겨찾기 관리" 진입률은 절반 가까이 떨어졌어요.
저희가 "당연히 필요할 것"이라 가정하고 상단에 크게 배치한 개인화 추천 위젯이, 실제로는 사용자들이 마이페이지에 들어오는 원래 목적(즐겨찾기 관리, 주문 내역 확인)을 방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지표가 나빠지자 그제서야 사용자 인터뷰를 급하게 잡았습니다.
열 명을 인터뷰했는데, 놀랍게도 아무도 개인화 추천 위젯을 먼저 언급하지 않았어요.
대부분 "마이페이지에 들어가는 이유는 저번에 담아둔 거 다시 보려고요"라고 답했습니다.
저희가 벤치마킹했던 서비스들은 콘텐츠 소비형 서비스라 추천이 핵심 가치였는데, 저희 서비스는 거래/관리형 서비스라 사용자의 목적 자체가 달랐던 거예요.
이 차이를 리서치 없이 벤치마킹만으로 판단한 게 가장 큰 실수였습니다.
인터뷰에서 더 뼈아팠던 건, 이 문제를 프로젝트 시작 전에 미리 알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희 팀에 이미 쌓여 있던 CS 문의 로그만 확인했어도 "마이페이지에서 즐겨찾기를 못 찾겠다"는 문의가 꾸준히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새로 인터뷰를 할 필요도 없이, 이미 있는 데이터만 봤어도 방향을 다르게 잡을 수 있었던 겁니다.
결국 개인화 추천 위젯을 하단으로 내리고, 즐겨찾기와 주문 내역을 상단에 다시 배치하는 재작업을 했습니다.
디자인 재작업에 2주, 개발 재작업에 3주가 더 들었어요.
처음 리서치를 했다면 아마 1~2주 정도의 시간으로 끝났을 일이, 잘못된 가정으로 시작해서 결과적으로 11주가 걸린 셈입니다.
게다가 그 2주 동안 나빠진 지표로 인한 실질적인 사용자 이탈은 되돌릴 수 없는 손실이었고요.
이 경험 이후로 제가 가장 많이 경계하게 된 말이 "리서치할 시간이 없다"입니다.
사실 저희가 리서치를 건너뛰고 아꼈다고 생각한 2주는, 나중에 재작업하느라 훨씬 크게 되갚아야 했어요.
리서치는 일정을 늦추는 요소가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시간을 미리 차단하는 요소라는 걸 이때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물론 모든 기획에 몇 주짜리 정식 리서치가 필요한 건 아닙니다.
저는 이후로 "이 가정이 틀렸을 때 되돌리는 비용이 얼마나 큰가"를 먼저 따져보고, 비용이 크다고 판단되면 최소한의 리서치라도 반드시 거치도록 원칙을 세웠어요.
간단한 경우엔 기존 CS 로그 확인이나 사내 슬랙 설문 정도로도 충분했고, 복잡한 경우엔 사용자 인터뷰까지 갔습니다.
중요한 건 "리서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이 프로젝트에 맞는 최소한의 확인 절차가 무엇인가"를 매번 판단하는 습관이었습니다.
이 일을 겪은 뒤로 주변 팀들의 비슷한 실패 사례를 들어보니 공통된 패턴이 보였습니다.
첫째, 벤치마킹한 서비스와 자기 서비스의 사용자 목적이 다르다는 걸 놓칩니다.
둘째, 이미 쌓여 있는 CS 로그나 문의 데이터를 확인하지 않고 새로운 가정부터 세웁니다.
셋째, "일단 만들고 반응을 보자"는 생각으로 리서치를 배포 후로 미루는데, 이때는 이미 되돌리는 비용이 커진 뒤입니다.
이 세 가지 패턴만 팀 내에서 서로 지적해줄 수 있어도 비슷한 실수를 많이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요즘 새 기획을 시작할 때 첫 회의 안건에 "우리가 지금 세우고 있는 가정이 뭔지"를 먼저 적어두고, 그 가정을 검증할 최소한의 방법을 찾는 걸 습관으로 만들고 있어요.
완벽한 리서치를 매번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우리가 지금 가정으로만 기획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팀이 인지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실패를 겪은 뒤로 리서치를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달라졌고, 앞으로도 이 실수는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