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 아이디어가 나올 때마다 바로 기획서를 쓰기 시작하면, 절반은 중간에 방향이 바뀌고 절반은 그냥 흐지부지됩니다.
저도 예전엔 아이디어가 나오면 바로 와이어프레임부터 그렸는데, 나중에 보면 "이게 정말 필요한 서비스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못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요즘은 신규 아이디어가 나오면 제일 먼저 린 캔버스(Lean Canvas)를 채워보는 걸 습관으로 만들었습니다.
린 캔버스는 문제, 고객군, 고유의 가치 제안, 솔루션, 채널, 수익 구조, 비용 구조, 핵심 지표, 경쟁 우위까지 한 장에 정리하는 프레임워크예요.
비즈니스 모델 캔버스와 비슷하지만, 스타트업 초기 아이디어 검증에 맞게 "문제"와 "솔루션"을 앞쪽에 배치한 게 특징입니다.
저는 이 순서가 특히 마음에 들었어요.
솔루션부터 생각하고 문제를 억지로 끼워 맞추는 실수를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저희 팀에서 최근 검토했던 "정기구독 리마인더 알림" 기능을 예로 들면, 캔버스를 채우기 전까지는 다들 "구독 관리가 편해질 것 같다"는 느낌으로만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캔버스의 "문제" 칸을 채우려고 하니, 실제로 우리 사용자가 겪는 문제가 뭔지 다들 정확히 말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기존 CS 문의 데이터를 뽑아봤고, "구독 해지를 깜빡해서 요금이 나갔다"는 문의가 전체 CS의 8% 정도를 차지한다는 걸 확인했어요.
문제가 숫자로 확인되자 캔버스의 나머지 칸을 채우는 방향이 훨씬 명확해졌습니다.
캔버스의 장점은 한 페이지라는 제약 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해요.
PRD처럼 길게 쓸 수 있는 문서라면 애매한 부분을 문장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있는데, 캔버스는 한 칸에 한두 문장만 들어갈 수 있으니 애매한 부분이 바로 드러납니다.
저희 팀에서 캔버스를 처음 써봤을 때, "핵심 지표" 칸을 채우다가 팀원 세 명이 서로 다른 지표를 적었던 적이 있어요.
누구는 "알림 클릭률"을, 누구는 "해지 문의 감소율"을, 누구는 "재구독률"을 적었습니다.
이 차이를 그 자리에서 발견하고 논의할 수 있었던 게, 오히려 개발이 다 끝난 뒤에 "그래서 이 기능 성공한 거예요?"라고 묻는 것보다 훨씬 나았어요.
저희 팀이 캔버스를 쓸 때 가장 오래 걸리는 칸이 바로 "고유의 가치 제안(Unique Value Proposition)"이었습니다.
"편리한 알림 서비스"처럼 뭉뚱그린 문장을 쓰면 리뷰할 때 바로 반려당해요.
저는 이 칸을 채울 때 "다른 대안(수동으로 캘린더에 적기, 은행 앱 알림)과 비교했을 때 우리만 줄 수 있는 게 뭔가"를 계속 물어보게 합니다.
리마인더 기능의 경우, 결국 "구독 서비스 안에서 결제 정보와 연동된 채로 알림이 오기 때문에 바로 관리 화면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른 대안과의 차이였어요.
이 문장이 나오기까지 회의를 세 번 정도 더 했던 것 같습니다.
캔버스를 채우는 것만으로 끝내면 의미가 없습니다.
저희는 캔버스의 각 칸 옆에 "이 가정이 틀렸다면 어떤 신호로 알 수 있는가"를 같이 적어두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어 "사용자는 해지 리마인더를 반갑게 여길 것이다"라는 가정 옆에는, "알림 클릭률이 15% 미만이면 이 가정은 틀린 것으로 본다"라고 적었습니다.
실제로 파일럿을 2주 돌려보니 클릭률이 22%로 나왔고, 이 정도면 가정이 맞았다고 판단해서 정식 개발로 넘어갔어요.
반대로 다른 아이디어였던 "친구 추천 리워드" 기능은 캔버스 검증 단계에서 초대 전환율이 예상치의 3분의 1도 안 나와서, 정식 개발 전에 접었습니다.
개발 리소스를 하나도 안 쓰고 아이디어를 접을 수 있었던 게 캔버스 덕분이었다고 생각해요.
캔버스를 쓰면서 느낀 건, 이게 정답을 주는 도구가 아니라 질문을 강제하는 도구라는 점이었습니다.
채우다 보면 팀이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가정이 사실 근거가 없었다는 게 드러나고, 그 가정을 검증할 방법을 같이 고민하게 돼요.
저는 요즘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면 회의 시작 전에 먼저 캔버스 초안을 각자 채워오게 하는데, 이렇게 하면 회의 시간의 절반은 "누가 뭘 다르게 생각했는가"를 맞춰보는 데 쓰게 됩니다.
처음엔 이 과정이 시간을 더 쓰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결국 잘못된 방향으로 두세 달 개발하는 것보다는 훨씬 빠른 길이었어요.
다음 아이디어 검토 때도 이 방식을 계속 써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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