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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자의 연습법에서 배우는 기획 습관

2016. 10. 17. 20:20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의 연습 이야기를 듣다 보면 기획 일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고 느껴요.
저는 전문 연주자가 아니라서 정확한 연습 이론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와 제가 직접 겪은 시행착오를 비유로 엮으면 쓸 만한 습관이 보이더라고요.
오늘은 반복, 느리게, 피드백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기획 습관을 정리해 봅니다.

 

연주자들은 기본적인 음계와 기초 연습을 매일 반복한다고 해요.
화려한 곡을 치는 날에도 그 바탕에는 지루해 보이는 반복이 깔려 있다고 합니다.

기획에서 이에 해당하는 것은 문서를 쓰는 기본 틀을 매번 같은 순서로 밟아 보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문제는 무엇인지, 누구의 문제인지, 해결하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를 매번 처음부터 적어 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기능이라도 이 세 줄이 흔들리면 문서가 길어져도 힘이 없더라고요.
저는 일을 시작할 때마다 이 세 줄을 일부러 새로 쓰고 있어요.

가정해서 예를 들어 볼게요.
한 달 동안 매일 아침 십 분씩 어제 본 서비스 화면 하나를 골라 이 화면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한 줄로 적는다고 해 봅시다.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한 달이 지나면 화면을 보자마자 목적이 눈에 들어오는 날이 늘어날 거예요.
짧은 반복이 쌓여서 눈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다만 반복에도 요령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아무 생각 없이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면 습관만 굳을 뿐 실력은 늘지 않는다고 하니까요.
매번 오늘은 이 부분만 더 잘하겠다는 작은 목표를 붙여서 반복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저도 문서를 쓸 때 오늘은 제목만 더 분명하게 써 보자 하는 식으로 목표를 하나만 정해요.

 

연습할 때 어려운 구간을 곡 전체 속도로 계속 반복하면 틀린 방식이 몸에 굳어 버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어려운 마디만 떼어 내 아주 느리게 정확히 치고 속도를 조금씩 올린다고 합니다.

기획에서도 복잡한 일을 한 번에 풀려고 하면 어디서 막혔는지 알 수 없게 돼요.
예약 서비스를 기획한다고 가정하면 예약 하나를 놓고 해야 할 일이 수십 가지입니다.
이럴 때 예약하기, 예약 변경하기, 예약 취소하기처럼 가장 작은 흐름 하나씩 따로 떼어 천천히 그려 봅니다.
각 흐름에서 사용자가 보는 화면, 시스템이 하는 일, 예외 상황을 하나씩 적고 나서 이어 붙이면 훨씬 덜 헷갈려요.
급할수록 느리게 쪼개는 것이 결국 빠르다는 것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느리게 하는 일은 눈에 띄지 않아서 성과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조급해지기도 해요.

 

연습하는 사람들은 자기 연주를 녹음해서 다시 듣는다고 해요.
연주하는 동안에는 몰랐던 박자의 흔들림이나 소리의 거친 부분이 다시 들으면 분명히 들린다고 합니다.

기획자에게 녹음에 해당하는 것은 내가 쓴 문서를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읽는 일 같아요.
쓴 직후에는 머릿속 맥락이 문서의 빈칸을 자동으로 채워 줘서 모든 문장이 명확해 보입니다.
하룻밤 자고 나서 읽으면 이 단어가 무슨 뜻이었지 싶은 문장이 꼭 나와요.
저는 중요한 문서는 보내기 전에 하루 묵혀 두거나, 안 되면 소리 내어 읽어 보는 방법을 씁니다.
소리 내어 읽으면 어색한 곳에서 숨이 걸려서 오류가 잘 잡히더라고요.

 

연습에는 선생님의 지적도 필요하고 청중 앞에서 연주해 보는 경험도 필요하다고 해요.
선생님은 기술적인 문제를 정확히 짚어 주고, 청중은 전달이 되는지를 몸으로 알려 줍니다.

기획에도 두 종류의 피드백이 있어요.
선배나 동료가 문서의 구조와 논리를 점검해 주는 것이 선생님의 역할이라면, 실제 사용자나 이해관계자의 반응은 청중의 역할이에요.
둘 중 하나만 있으면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쉬워서 일정 중간에 두 가지를 모두 넣어 두는 편이 좋습니다.
작게라도 보여 주고 반응을 듣는 시간을 일부러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가정해서 새 가입 화면 기획서를 쓴다고 해 봅시다.
먼저 동료에게 보여 주어 항목의 순서와 빠진 예외가 없는지 점검받습니다.
그다음 주변 사람 두세 명에게 화면 그림을 보여 주며 어디에서 망설이는지 지켜봐요.
동료는 말로 알려 주고 사용자는 표정과 손동작으로 알려 줍니다.
두 반응이 서로 다를 때 오히려 가장 큰 단서가 나온다고 느꼈어요.

 

연습에서는 틀려도 괜찮고, 실전에서는 흐름을 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들었어요.
기획자도 연습 문서와 최종 문서의 성격을 구분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초안을 쓸 때는 틀려도 괜찮으니 일단 끝까지 쓰고, 정리는 그다음에 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완벽한 문장을 쓰려다 첫 줄에서 한 시간을 보냈던 날이 저에게도 많았습니다.

연습 기록을 남기는 것도 도움이 돼요.
무엇을 연습했고 어디에서 막혔는지 몇 줄만 적어 두면 다음 연습의 출발점이 됩니다.
저는 일주일에 한 번, 이번 주에 다르게 해 본 것 하나를 적는 메모를 쓰고 있어요.
몇 주가 쌓이면 내가 어떤 부분에서 자주 막히는지가 눈에 보입니다.

 

반복으로 기초를 다지고, 어려운 부분은 느리게 쪼개고, 다시 들어 보고, 두 종류의 피드백을 받는 것이 제가 건져 낸 습관입니다.
아직은 의식적으로 하는 단계라서 바쁠 때는 쉽게 건너뛰게 돼요.
습관이 되려면 얼마나 오래 반복해야 할까요.


재능이나 센스라고 부르는 것 중 상당 부분이 사실은 이런 연습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이 질문은 시간이 지난 뒤 제 문서를 다시 읽을 때 답이 보일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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