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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카네기 (Andrew Carnegie)

David.Cheon 2014.06.22 21:03


앤드류 카네기는 1835년 11월 25일, 스코틀랜드의 던펌린에서 태어났다. 직조공이었던 그의 부친은 수동식 직조기를 이용하는 작은 가내 공장을 운영했는데, 1847년에 증기식 직조기가 도입되면서 하루아침에 생계가 어려워지고 말았다. 급격히 가세가 기울면서 앤드류는 일찌감치 세상 물정에 눈뜨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서 돈을 벌어 가난을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듬해 1848년에 카네기 일가는 결국 고향을 떠나 이민선에 몸을 실었고, 미국에 도착해서는 친척이 사는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인근에 정착했다.당시 13세였던 앤드류는 주급 1달러 20센트를 받고 면직물 공장에 들어가 일했으며, 다른 공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운 좋게 공장주의 눈에 들어 사무 보조도 담당한다. 학력이라곤 던펌린 시절 초등학교를 다닌 것이 전부였지만, 사회생활 초기에 카네기는 남다른 근면과 성실을 발휘하여 상사의 호감을 샀으며, 간혹 찾아오는 행운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대한 이용했다.

가령 전신국에 전보 배달원으로 취직하자마자 어깨너머로 전신 업무를 익혀 두었다가, 담당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능숙하게 업무를 대신해 상사에게 인정받고 정식 전신기사가 된 사례가 대표적이었다. 1853년에 카네기는 전신국의 단골손님인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의 피츠버그 지부장 토머스 스콧에게 스카우트된다. 스콧은 철도 업무뿐만 아니라 투자에 관해서도 조언하는 등, 카네기에게 더 큰 기회로 통하는 문을 열어준 일생일대의 은인이었다. 1855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앤드류 카네기는 20세에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1856년에는 우연한 기회에 철도 침대차 사업에 투자해 처음으로 거금을 벌어들인다. 217달러 50센트를 대출받아 투자한 결과, 불과 2년 만에 매년 5천 달러의 배당금이 나올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1859년에 카네기는 스콧의 뒤를 이어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의 피츠버그 지부장으로 승진했고, 이때부터는 제법 재산을 모아 부유층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1861년에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카네기는 전쟁부에서 일하던 스콧을 따라 워싱턴으로 향했고, 자기 분야에서의 경험을 살려 철도와 전신의 복구 업무를 담당한다. 이듬해에는 무려 14년 만에 어머니와 함께 고향 던펌린을 방문하고 감회에 젖는다. 그 즈음 카네기는 미국 석유산업 초기의 산유지로 유명한 타이터스빌의 석유회사에 거금을 투자해서 막대한 이득을 얻었고, 이는 훗날 그가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는 밑천이 되었다.

1863년에 카네기는 키스톤 교량 회사를 공동 설립함으로써 철강 분야에 처음으로 뛰어든다. 30세 때인 1865년에는 자기 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12년간 몸담았던 펜실베이니아 철도 회사에서 퇴직했다. 1867년에는 유니온 제철소, 1870년에는 루시 용광로 회사를 연이어 설립하며 사업의 폭을 넓혔다. 1872년에 영국의 헨리 베세머 제강소를 방문한 카네기는 그곳에서 독특한 방법으로 생산되는 강철의 놀라운 잠재력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에 주로 사용되던 선철은 제조가 쉬운 대신에 수명이 짧았던 반면, 강철은 선철보다 수명이 긴 반면에 제조 과정이 복잡했다.

카네기가 훗날 ‘강철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까닭은 미국에서 강철의 대량 제조 및 유통을 실현시켰기 때문이다. 남북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대부분의 철을 외국에서 수입했지만, 이후로는 수요가 급증해서 철강 사업의 미래가 밝았다. 카네기는 1875년에 미국 최초의 강철 공장인 에드거 톰슨 강철 회사를 설립했고, 이 과감한 투자는 곧바로 큰 성공으로 이어졌다. 이후 카네기는 안정적인 원료 공급과 생산 및 유통을 위해 관련 업체를 연이어 합병하거나 매입했다. 가령 1881년의 프릭 코크스 회사 합병, 1886년의 홈스테드 제강소 매입 등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자기보다 더 우수한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았던 사람


1886년에 카네기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두 사람을 잃는다. 남동생과 어머니가 불과 한 달 사이에 장티푸스로 나란히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30년 넘게 홀어머니를 모시고 독신으로 살면서 효자 노릇에만 전념했던 앤드류 카네기의 삶은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난 직후인 1887년에야 52세의 앤드류 카네기는 29세의 루이즈 휘필드와 결혼하고, 62세 때인 1897년에야 외동딸 마거릿을 낳는다. 결혼 이후부터 카네기는 일선에서 한 발 물러나 한 해의 절반가량은 고향 스코틀랜드에 머물곤 했다.

카네기를 이야기할 때마다 반드시 언급되는 악명 높은 ‘홈스테드 학살 사건’도 이 즈음에 벌어졌다. 1892년 6월에 카네기의 소유인 홈스테드 제강소에서 임금 협상 문제로 노사 갈등이 첨예화되었다. 카네기의 동업자이며 회사의 2인자였던 헨리 클레이 프릭은 공장 폐쇄라는 일방적인 조치를 감행했고, 이에 반발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며 사태가 악화되었다. 프릭은 공장을 탈환하기 위해 경비 용역업체인 핑커턴 회사 소속의 사설 경비원을 수백 명 투입했다. 그 와중에 경비원과 노동자 간에 충돌이 빚어져 10명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결국 주 방위군이 투입되어서야 사태가 진정되었다.

이 사건은 록펠러 소유의 러들로 광산 학살사건과 함께 미국 역사상 최악의 노동 탄압 사건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얼마 뒤에 한 아나키스트가 헨리 클레이 프릭을 암살하려다 실패함으로써 여론은 오히려 회사 측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사태를 수수방관했다는 비난이 빗발치면서, 이전까지만 해도 정직한 기업가이며 노동자의 벗으로 행세했던 카네기의 이미지에는 타격이 불가피했다. 1892년에 카네기는 기존의 철강 관련 사업체를 하나로 묶어 카네기 철강 회사라는 트러스트를 결성한다. 이 회사는 한때 미국 철강 생산의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행사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인 1901년에 카네기와 모건의 유명한 ‘빅딜’이 벌어졌다. 일설에 따르면 카네기 철강 회사에서 사업을 확장해 완제품 생산까지 노리자, 당시 2위 철강 업체의 소유주였던 모건이 과당 경쟁을 우려한 나머지 매각을 제안했다고도 한다. 또 카네기가 이에 적극적으로 응했던 까닭은 은퇴에 대한 열망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너무 비대해진 사업을 정리하는 문제로 내심 고민하던 까닭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결국 카네기는 4억 8천만 달러에 회사를 매각했고, 이후 모건은 다른 철강 회사까지 포함하여 자본금 14억 달러의 세계 최대 철강회사 유에스 스틸을 설립한다.

카네기는 한창 사업 확장에 분주했던 1868년, 나이 33세 때에 이미 은퇴 계획을 세운 바 있었다. 35세에 은퇴하고 생활비 연 5만 달러를 제외한 나머지 수입은 모두 자선사업에 쓰겠다는 계획이었다. 실제로 그의 은퇴는 계획보다 30년이 늦은 1901년에야 이루어졌지만, 지연된 햇수에 걸맞게 자선사업에 쓸 돈은 크게 늘어나 있었다. 당시의 4억 8천만 달러는 2000년대 중반의 가치로 대략 100억 달러가 넘는다. 이후 카네기는 여러 분야의 자선사업을 관장할 기구를 조직해서, 1902년에 카네기 협회, 1905년에 카네기 교육진흥재단, 1910년에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1911년에 카네기 재단이 설립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1914년에 카네기는 [자서전]을 완성했고, 5년 뒤인 1919년 8월 11일에 매사추세츠 주 세도브룩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가 말년에 보유했던 4억 8천만 달러의 재산 가운데 약 4분의 3에 해당하는 3억 5천 달러는 이미 사회에 환원된 다음이었다. 그의 유해는 뉴욕 주 태리타운의 슬리피 할로 묘지로 옮겨져 매장되었는데, 이곳은 그가 좋아했던 미국 작가 워싱턴 어빙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묘비에는 생전에 그가 좋아하던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자기 자신보다 더 우수한 사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았던 사람이 여기 누워 있다.”


악덕 자본가와 자선사업가, 카네기를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



마크 트웨인은 미국 경제가 급속한 발전을 이루며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1865년부터 1890년까지의 기간을 가리켜 ‘도금 시대’라고 일컬었다. 이 당시에는 ‘강도귀족’으로 일컬어지던 전설적인 기업가들이 줄줄이 배출되었으니 철강 분야의 앤드류 카네기, 석유 분야의 존 데이비드슨 록펠러, 철도 분야의 제이 굴드, 금융 분야의 존 피어폰트 모건이 대표적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아마도 록펠러와 카네기이겠지만, 사상 최대의 악덕 자본가로 폄하되는 록펠러에 비하자면 카네기는 갖가지 자선활동 덕분에 비교적 긍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물론 홈스테드 학살 사건에서 볼 수 있다시피 카네기에게도 악덕 자본가로서의 면모는 분명히 있었다. 평소에도 워낙 인색한 성격이었던 카네기는 갖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임금을 삭감했으며, 그런 한편으로 자사 노동자의 개별 임금 인상보다는 차라리 공익을 위한 기부 행위가 더 바람직하다는 식의 지론을 펼치곤 했다. 즉 내가 가진 부는 어디까지나 내 능력의 결과이므로, 인류 전체를 위한 기여라면 몰라도 무능한 개인에게는 베풀지 않겠다는 사고방식이었다. 이런 사고방식은 카네기의 친구이며 당대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다윈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된다.

역설적이게도 카네기는 인류애는 넘쳐났지만 인간미는 없었던 인물이었으며, 그의 수많은 기부 행위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자면 적잖이 빛이 바래는 것이 사실이다. 카네기의 수많은 자선사업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도서관 건립 사업이었다. 사회생활 초기에 어느 독지가의 무료 도서관을 이용했던 경험에서 착안했다는 이 사업을 통해, 1881년에 카네기의 고향 던펌린을 시작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2천 5백 개 이상의 도서관이 세워졌다. 1900년에는 카네기 공과 대학(현재는 카네기 멜론 대학)이 설립되었고, 1891년에는 지금까지도 세계적인 공연장으로 유명한 카네기 홀이 개관했다.카네기는 달변으로도 유명했으며,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중에서 부자의 사회적 책임을 역설한 [부의 복음](1889)이 당대에 크게 주목을 받았고, [자서전](1914)에는 흥미진진한 일화가 많지만 상당 부분은 자화자찬과 고의적 왜곡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받는다. 1908년에 카네기는 언론인 나폴레온 힐에게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공통분모를 한 번 찾아보라고 제안했는데, 그 결과로 힐은 긍정적 사고방식의 중요성을 역설한 대표작 [성공의 법칙](1928)과 [생각하면 부자가 된다](1937)를 썼다. 반면 또 다른 자기계발 전문가 데일 카네기의 ‘카네기 성공론’은 앤드류 카네기와는 전혀 무관하다.

“카네기는 비범한 지성, 스코틀랜드인다운 실용성, 활력, 엄청난 매력, 거래에 대한 예리한 본능 등 모든 사람을 능가하는 아주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도금시대의 거물 기업인에 관한 저서에서 찰스 R. 모리스는 이렇게 평한다. “(동시에) 카네기는 (...) 어떤 짓을 해서라도 상대를 지배하려는 성격이었다. 아주 매몰찬 사람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치 자신의 본분이 사회복지 사업이라도 되는 듯 늘 인도주의적 이상가로서 버젓이 행세했다. 세계 최고의 강철왕이 되어서도 여전히 노동자에 대한 요구 강도를 높이고, 그들의 봉급을 삭감하면서도 친(親)노동자 성명을 발표하고 측근의 아첨을 받았다.”

평화주의자로 자처하면서도 돈벌이의 기회 앞에서는 이런 이상을 종종 망각했던 카네기의 모순적인 행보도 같은 맥락이었는데, 그중 한 번은 미국 정부에 납품한 군용 강철 제품 가운데 일부가 불량품이라는 사실이 폭로되어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반면 카네기의 전기를 쓴 레이몬드 라몬 브라운은 보다 조심스러운 평가를 제안한다. “한 가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18세기의 스코틀랜드인다운 사고방식으로 19세기를 살았던 그를 사람들이 섣불리 21세기의 방식으로 평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현대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들이 과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그 과정의 수많은 문제점을 감안하더라도, 카네기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사업가 가운데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그 동기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없지 않더라도, 카네기가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자선사업가 가운데 하나였음도 분명하다. 당대 최고 갑부였던 록펠러조차도 이 분야에서는 감히 카네기를 능가하진 못했다. 어쩌면 카네기는 철강 분야에서 일종의 표준을 세운 것처럼 자선사업에서도 일종의 표준을 세웠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돈으로 명성을 살 수는 없는 법이지만, 적어도 역사상 그런 경우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사람은 앤드류 카네기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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